태극권의 역사에서 언급하였듯이 태극권의 발생지는 중국 하남성 온현의 진가구이다. 진가구는 온현성 동쪽의 청풍령에 위치하며 600년 전에는 상양촌이라고 불렀다. 온현의 현지(懸誌)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명나라 건국 초기 홍무 초년, 원의 철목이가 회경부(지금의 온현부근의 심양)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명나라의 군사가 오랫동안 공격을 하였으나 항복을 받지 못하였다.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몹시 조급하게 되어 이에 명 태조가 그 곳 백성들에게 분풀이를 하여 대량 학살을 감행하였으니 그때 온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 곳에 사람의 흔적이 거의 끊어지게 되자, 정부에서 다른 지방의 사람들을 이주시켜 밭을 갈고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하였다.
당시 이주민 열 중의 여덟 아홉 명은 산서성의 홍동에서 옮겨 왔는데, 그 곳에서 지금까지도 "우리 조상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산서 홍동의 대괴수에서 왔답니다."라는 말이 남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도 산서성 홍동현에 가면 진식 태극권의 원류라고 하는 무극통비전권(홍동통비권) 117식이 존재하고 있다. 실 예로 2001년도에 진가구를 방문 했을 때 지인을 통하여 무극통비전권 117식(판매용이 아닌 교육용 교재)을 복사하여 볼 수 있었다. 무극통비전권에는 호심권, 육봉사폐, 금강도추, 옥녀천사, 운수, 금계독립 등등의 현재 우리가 수련하고 있는 태극권의 용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진가구에 정착한 진씨의 시조는 진복이라는 사람이다.
시조 진복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후덕할 뿐 만 아니라, 권술과 병장기 등의 무술에도 정통하였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그런 연유로 그가 살았던 곳을 진복장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진복장은 그 지세가 낮아 자주 수해를 입게 되자, 다시 온현성에서 동쪽으로 십리 거리에 있는 상양촌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진가구는 황하에 인접하여 피해가 극심하였다 한다. 실 예로 진소성 선생님의 현재의 자택자리가 1958년 황하강의 범람때 완전히 침수하였다 한다.

그 마을에는 남북으로 뻗어 있는 깊은 도랑(構)이 있었는데, 진씨의 인구가 번성함에 따라 진씨 가문과 지리적 특성을 살려 상양촌은 진가구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진씨의 선조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진씨 가문에 대한 문자 기록으로서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진씨 9대조 진왕정의 대에 이르러 기록된 것이 처음이다.
온현의 현지와 진씨 가보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진왕정은 명말 때 사람으로 권술에 정통하였다. 그는 권술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 마음으로 깨닫는 바가 많았으니, 이것이 대대로 전해져서 독특한 진씨 가문의 비법을 이루었다."

진왕정(1600~1680)은 주정이라고도 불리웠는데 명말 청조때 사람이다.
문무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권계에 정통하였는데 그 조예가 깊어, 하남 · 산동 일대에서 매우 명성이 높았다. 그는 일찍이 산동에서 도적 떼를 소탕하였으며, 그 후 도적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서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뜻을 펴지 못하고 은거했다.

그는 노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무술을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권술을 근간으로 하여 여러 문파의 정수를 모아 그 장점을 취하여 접목하는 한편, 태극음양의 이치를 결합시키고, 중의의 경락학설과 도인 · 토납의 기술을 참고로 하여 음양 상합하고 강유 상제하는 이치로 구성된 권법을 새로이 창조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태극권의 시초인 것이다.



당시 진왕정이 창안하여 후대에 전수한 것은 태극권 오로를 비롯하여 포추 일로 · 장권 108세 · 쌍안추수와 도 · 창 · 검 · 곤 · 간 · 쌍인점창 등이 있다.
진왕정은 이에 대한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대부분 산실되었고, 지금은 《권경총가》와 《장단구》 한수가 남아있다.
장단구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니 감회가 새롭구나.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서 도적들을 소탕하느라 얼마나 많은 위험을 만났던가! 그 공로로 나라의 은혜를 입기도 하였으나 세월을 헛되이 보내며 이렇게 오늘에 이르고 보니, 이제는 늙어서 남은 목숨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르지 남겨진 《황정》한 권을 곁에 두고서, 마음이 답답할 때는 권법을 만들고, 조급함이 일 때는 밭을 갈고는 한다네. 틈틈이 시간을 내어 여러 아이들을 가르치니 제 나름대로 용이 되고 호랑이가 되어 간다네. 관가에 양식을 빚지면 일찍 갚아주고, 이웃이 빚을 요구하면 즉시 돌려주고, 교만하거나 아첨하지 않으며 참고 양보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네. 사람들이 나더러 어리석다 말하고, 사람들이 나더러 마쳤다고 말하지만, 늘 귀를 씻고 벼슬살이를 마다하였네. 수 많은 제후들을 비웃으며 내 나름대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나의 마음 속에 늘 여유 있고 편안함을 추구하고, 명예나 이익을 절대로 탐하지 않는 것이 보다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네. 이제 세상살이의 이치를 깨닫고 보니 저 한단을 알게 되고, 물고기가 노니는 물가에서 성정을 도야하며 산천에 머물고 있으니, 흥한들 어떠하며 망한들 어떠하겠는가. 세상을 사는 경계가 평안하고 건강하며 언제나 물욕이 없다면, 시기할 것도 구할 것도 없는데 어찌 세상살이를 참견하겠으며, 성공한들 어떠하며 실패한들 어떠하랴. 그러하니 이 몸이 신선이 아니라면 누가 신선이겠는가?"

진왕정 이후로 진가구에서는 태극권을 수련하는 풍조가 성행하게 되었다.

진씨 제14대조 진장흥(1771~1853)은 자가 운정으로 《태극권 십대요론》·《태극권 용무요언》·《태극권 전투편》등의 저서를 남긴 근대 태극권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조상 대대로 전해져 오던 `노가 투로'를 기초로 하여 그 이전에 복잡하게 많았던 태극권의 투로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모든 권가를 재창조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진씨 태극권 일로와 이로(또는 포추) 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태극권 노가식 또는 대가식' 이라고 부른다.
장흥공은 보표를 직업으로 하여 산동 지방에서 근무하였는데 그 지역 무술계에서 매우 이름을 날렸다.

어느 날, 그는 무대 앞에서 연극을 보느라 수백 명의 인파 속에 서 있었는데, 사람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며 밀어붙여도 그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가까이 간 사람은 마치 흐르는 물이 돌에 부딪친 것처럼 저항하지 못하고 저절로 떠밀렸으니, 사람들은 그를 `패위대왕'이라고 불렀다.

산동에서 보표로 일하면서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도적 떼들이 그의 앞에서는 아예 종적을 감추게 되니, 이 지역 사람들은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 기념하였다.
그의 아들 경운도 무예에 정통하여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경운의 아들 연년과 연희도 모두 태극권의 명수가 되었다. 특히 장흥공은 그 유명한 제자 양로선을 가르쳤다.



제14대 진유본은 진장흥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원래 있던 투로의 기초 위에서 어려운 동작과 발경하는 동작들을 변형시켜 새로운 투로를 개발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그 투로가 노가 일로와 유사하게 전개하는 것으로 후세 사람들은 이를 신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후 진발과에 의해서 새로운 신가 투로가 나옴에 따라 오늘날에는 이것을 소가라고 부르고 있다.

제15대 진청평은 조보진으로 가서 데릴사위를 살았는데, 그 곳에서 권술을 전파하면서 새로운 투로를 창안하였다.
그는 원래의 투로에 다시 수정을 가하여 작고 정교하면서도 치밀하게 하였으며, 점차 그 범위를 더하여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변화시키고, 나아가 권술의 기교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연습 투로를 만들어 후대에 전수하니, 16대 화조원 문파에서는 이것을 조보가식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16대 이경연 문파에서는 홀뢰가식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제16대 진흠(1849~1929)은 자가 품삼이다.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태극권의 학설을 밝히고 그 내용을 보존하기 위해 책을 쓸 것을 결심하고, 12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진씨태극권도설》 4권을 저술하기에 이르니, 마침내 진씨 가문에 대대로 축적되어 온 연권의 경험이 세상에 명백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그는 역리로써 권리를 설명하며 경락학설을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며, 전사경을 핵심으로 하여 내경을 총괄하였는 바, 이것은 진씨 태극권 이론의 보고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편이 된 것이다. 이외에도 《진씨가승》·《삼삼육권보》등의 저서가 있다.


제17대 진발과(1887~1957)는 자가 복생이다. 이 사람은 근대 진씨 태극권의 대표적 인물로 태극권의 발전과 전파에 뛰어난 공헌을 하였다.

1929년부터 1957년까지 줄곧 북경에 머무르면서 권술을 가르쳤다.
그는 강유상제의 권법을 펼침에 있어 채 · 열 · 주 · 고 · 나 · 질 · 척 · 타 등의 동작들을 겸용하였는데, 그 기격 기술이 매우 뛰어나 사람들과 겨룰 때면 반드시 이길 뿐 만 아니라 상대의 마음까지도 얻었다고 한다. 그는 형태가 드러나지 않는 교묘하고 우수한 격법으로 상대를 압도하였으며, 더욱이 그의 충직하고 온후한 인간성과 고상한 무덕으로 인하여 항상 각계 인사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문하에 매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니, 심가정 · 고류형 · 홍균생 · 전수신 · 뢰모니 · 풍지강 · 이경오 · 초마림 등이 있다. 그의 아들 조욱 · 조규와 딸 예하가 있으며, 손자로는 진소왕 · 진소성 등이 있다.



제18대 진조비(1893~1972)는 자가 적보이다.
1928년 가을, 북경 동인당 동가의 낙우신과 낙독동 형제는 진씨 태극권의 명성을 흠모하여 하남 심양의 두성흥에게 진가구에서 사범을 초빙할 것을 부탁하자, 그 집안사람들이 진조비를 추천하여 가게 되었다


그가 북경에 도착하자, 고향 사람 이경장이 북평만보(1928년 10월)에 "우리나라가 무술을 제창하는 목적은 나라를 지키고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무술을 익혀서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찾읍시다."라고 기재하여 널리 알렸다고 한다.

진조비에게는《진씨태극권회종》·《태극권입문》·《진씨태극권도해》·《진씨태극권이론13편》등의 저서가 있다.


제18대 진조규(1893~1972)는 일찍이 북경 · 상해 · 정주 · 초작 등지에서 권술을 가르쳤는데 그에게 배운 사람들이 매우 많아 진씨 태극권 보급에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신 그가 주로 전수한 권가는 그의 부친인 진발과가 만년에 제정한 팔십삼세식으로 오늘날 신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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